정부재정

나는 매 학기 초 전공과목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경제분석의 기본 틀’이라는 특집 강의를 한다. 경제원론은 물론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등 기본 코어 과목을 듣고 온 학생들이지만 실제 현실 사례로 들어가면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학 교육의 현실이다. 교수들 수준은 높아졌지만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이나 방식은 내가 학생이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애매모호한 이론 설명에다 수학이나 통계학 기법을 덧붙이니 현실 경제를 이해할 능력 배양을 기대했던 학생들이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누구의 잘못이라 짚어 말하기 어려운 시스템 차원의 문제다. 교과 내용이나 평가 방식의 획기적 전환은 물론 대학 운영의 자율성까지 생각해야 할 사안이다. 이 문제를 걱정해온 학자들이 많지만 수십 년을 지속해온 관행을 깨기는 어렵다. 나 역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현실에 타협한 지 오래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몇 가지 핵심 주제를 골라 이론과 현실이 교차하는 방식을 보여주곤 한다.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왜 우리나라는 도로공사를 밤에 하지 않고 낮에 자주 하느냐이다. 밤에 공사하면 교통 체증이 덜 해 민간 경제주체들이 부담하는 시간 비용이 덜하다. 반면 인부들의 시간당 임금이 높게 책정돼 정부의 비용 부담은 커질 수 있다. 이 양자를 합쳐 생각해야 사회 전체의 편익-비용 판단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논쟁 수준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밤에 공사할 때 증가하는 인건비는 장부에 잡히지만, 운전자들이 누리는 시간 절약 혜택은 측정하기 어렵다. 툭 하면 국민 혈세를 낭비한다 윽박지르는 사회 분위기에서 담당 공무원의 선택은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가계나 기업과 다르다. 자기 살림도 잘해야 하지만 사회 전체의 후생에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비슷한 공사를 밤에 하는 빈도가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슷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도로 공사를 했는데 통행료 수입만으로는 공사비를 회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때 정부가 수요 예측을 잘 못 해 수입이 예상에 못 미쳤다면 비판할 수 있지만 통행료 수입으로 공사비 충당을 못 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회계 장부에는 없지만 이 도로로 인해 절약된 시간의 가치는 공공 정책 판단에 있어 절대 빠트려서는 안 되는 사회적 편익이다. 다른 예로, 외환위기 당시 무너진 금융 시스템을 복구하기 위해 150조 원이 넘는 재정자금이 투입됐는데 이 “혈세” 중 얼마를 회수하느냐가 당시 언론이나 정부의 주된 관심사였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국민 세금이 얼마나 들어갔느냐가 아니라 그로 인한 성과가 무엇이냐였다. 당시 시중 은행 몇 개만 손보고 덮은 탓에 이후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의 부실이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유누스(Muhammad Yunus) 교수의 소액금융(micro-credit)을 본 따 소상공인을 위한 ‘미소금융’ 제도를 실시했다. 매우 좋은 취지의 제도였지만 금방 흐지부지됐는데 그 이유는 영세 사업자들에게 들어간 돈의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한 공무원들의 몸 사리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들어간 돈은 당연히 못 돌려받는다 생각하고 지출해야 하는 항목이다. 즉, ‘투자’가 아니라 복지 개념인 ‘이전지출’이라 봐야 한다. 정부는 사채업자가 아니다. 최근 들어 공원 청소나 강의실 불 끄기 같은 노인용 관제 일자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또한 틀린 생각이다. 현금으로 주건 일자리로 주건 그런 성격의 예산은 복지지출이다. 일자리 정책을 비판하려면 다른 데서 사례를 찾아야 한다. 

위에서 예시한 오류들은 모두 정부의 기본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정부 정책은 사회적 비용과 사회적 편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근데 우리 사회의 정책 논쟁을 보면 비용과 편익 중 한쪽만 보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눈에 보이는 회계적 수지 타산만 따지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니 편견이 진실로 둔갑하며 의미 없는 정파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정부가 일할 때는 당연히 장부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편익과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편익이나 비용을 측정하는 핵심 개념은 ‘기회비용’이다. 경제학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귀에 익은 표현이지만 그 쓰임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한 시간 공부하는 기회비용은 밖에 나가서 한 시간 노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강의를 하고 마친다면 뭣 하러 비싼 등록금 내며 대학을 갈까. 경제학 전공생들은 ‘자원 배분의 효율’이란 표현을 귀가 닳도록 수업 시간에 듣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계나 기업이나 정부나 나름의 효율적 선택이 있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율은 앞서 언급한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다. 

자원이라는 말도 너무 추상적으로 접근하면 더 헷갈린다. 그냥 시간과 돈이라 생각하면 충분하다. 내가 점심 먹으러 갈 때는 한 시간과 1만 원이라는 자본이 들어간다. 어떤 행위에 들어가는 모든 자원 비용을 경제학적 비용(economic cost)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점심 값은 1만 원이라는 회계적 비용만 의미한다. 하지만 1시간도 내 소중한 자원이다. 이 시간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기회비용을 사용한다. 한 시간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시급 1만 원을 받는다. 만일 점심을 먹는 총 효용이 총 경제학적 비용인 2만 원보다 못하다면 더 싸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택해 시간과 금전적 비용을 줄이려 들 것이다. 

이처럼 기회비용은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냥 뻔한 정의만 외우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비용과 편익도 은연중에 우리 몸에 배어 있는 분석 틀이다. 나는 ‘거래의 조건은 남는 장사’라고 가르친다. 내가 가진 커피 한 잔을 다른 사람의 생수 한 병과 교환하려 할 때 나는 생수의 가치가 더 높다 판단해야 거래에 응할 것이다.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잘 돌아가는 시장이라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만족하는 지점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며 사회후생이 극대화된다.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이 석사과정 2년간의 수업료 200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엄마는 여기에 대졸 초봉 2년치 6000만 원이라는 시간의 기회비용을 더한 8000만 원을 총비용으로 계산한다. 경제학을 배운 적은 없지만 경제학적 비용 개념을 정확히 아는 셈이다. 물론 똑똑한 딸이라면 대학원 과정을 통해 얻는 지식의 가치가 그보다 더 클 수 있다는 편익-비용 계산서를 내놓을 것이다. 쉽게 수긍할 엄마는 드물겠지만. 

예전 반값 등록금 논쟁이 벌어졌을 때 외국 대학 등록금과 비교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 대학의 일 년 등록금이 1000만 원이라고 하버드의 3000만 원보다 “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하버드 교육은 3000만 원어치의 가치가 있고, 한국 대학은 500만 원 정도의 편익만 제공한다면 뭐라 답할 것인가. 

경제학은 경제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개념들은 경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교육은 이론을 위한 이론을 가르치는 관행에 젖어 있다. 경제학 과목은 각종 공무원 시험에 필수로 등장하는데 저런 식의 추상적 문제 푸는 능력이 공무원 자질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몇 가지 이론이나 달달 외우게 하지 말고 정부가 무엇 하는 곳인지, 좋은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충분히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압박을 받을 때 자신의 자리를 걸고 나서기는 어렵다. 그래도 예전에는 기개 있는 공무원을 보기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관료사회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보인다. 아마 공무원을 정치적 도구로 생각하는 정치 세력이 늘어난 탓이 클 것이다. 대학이 아닌 학원에서 공무원 후보들을 교육시키는 현실 또한 정상이 아니다. 내가 정부나 정치를 비판하긴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대다수 공무원들의 고충에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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